나의 서재/인문:나와 대한민국 & 지구촌의 역사

나는 내가 낯설다 등을 읽고 – 셀픽션은 감동이 없고 경제경영 서적은 새

3.0CEO 2007. 9. 19. 11:00

나는 내가 낯설다 등을 읽고 셀픽션은 감동이 없고 경제경영 서적은 새로움이 없다

 

2007년 상반기의 경제경영 서적

매우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2007년 상반기에는 정말 읽을 만한 책을 찾기 어려웠다. 물론 나의 주요 관심사인 인문, 경제, 경영 분야에 국한된 이야기이기는 하다. 나의 졸저 [명품경영학]에 소개하기 위해 지난 해 열심히 많은 책들을 뒤적거린 탓도 있을게다.

 

최근 트렌드의 하나로 자리잡은 셀픽션(셀픽션(selfiction):자기계발(self help)과 소설(fiction)을 접목한 신조어. ‘우화형 자기계발서’라고 부르기도 한다.)에 속하는 베스트셀러들이 나오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만의 특별한 취향때문인지 읽고 나면 후회스런 마음에 속이 아프다.

 

100만부 이상 팔린 ‘마시멜로 이야기’(한국경제신문) 100만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배려’(위즈덤하우스) 등이 셀픽션을 대표하는 책이다. 소설을 읽듯 부담 없이 읽다 보면 주인공과 유사한 상황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주인공의 극복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기계발에 필요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이들 서적이 잘팔리는 이유라고 출판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소설처럼 읽을 수 있고 하나의 스토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메시지가 간단하고 명쾌하기는 하다. 독자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동의하고 싶다.

 

셀픽션 책의 초반부에는 언제나 위기를 맞이한 주인공이 등장하며, 곤경에 처한 주인공에겐 어김없이 그를 도와줄 멘토가 나타난다. ‘청소부 밥’(위즈덤하우스)에서는 청소부로가 ‘에너지버스’(쌤앤파커스)에선 버스기사가 그들이다. 이들의 역할은 모두 동일하다. 이런 동일한 패턴에서 재미나 감동을 찾을 길은 없어 보인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너무 뻔하다.

 

이런 류의 책을 읽는니 한편의 소설을 읽는 것이 나에게는 유익하지 않을까?

 

본격적인 자기계발 류와 경제경영 서적들도 들�거려 보지만, 새로운 시각이나 지식을 전달해 주는 책들은 찾기 어렵다. 대부분 포장만 바꾸어 나온 책들이 대부분이다. 허긴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법이나 이론이 그렇게 쉽게 나올 수도 없는 일이다. 이 시대의 경영이나 경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이론이 부족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 일부분이라도 확실하게 실행하고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다.

 

코넬리스 클뤼버와 존 피어스 2세의 전략이란 무엇인가?: An Executive Perspective”에서 새로운 시각을 기대하였지만 MBA 강의에 사용할 만한 관점(An Student Perspective)에서 벋어나지 못하고 있어 재미있게 읽어 내지 못했다. 그 밖에 단순함의 법칙과 몇 권의 경영관련 서적을 읽었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낯설다

다행히도 올 상반기에는 심리학 서적이면서 자기계발에 도움이 될 만한 책 하나를 건져냈다. 티모시 윌슨(Timothy Wilson) [나는 내가 낯설다]라는 책이 그렇다. “‘훌륭한 일을 하라, 그러면 훌륭한 존재가 된다는 원칙은 심리학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교훈 중의 하나이다.”라는 티모시 윌슨의 말처럼 [나는 내가 낯설다]가 얻어내는 결론은 실천하고 실천하고, 또 실천하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자신에 대해 좀 덜 생각하고 그 대신에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역설적이라는 말하는 이유는 저자 티모시 윌슨은 자신의 책 대부분에 무의식의 존재와 역할, 그리고 그 특징을 설명하는 데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스스로 규정하듯 이런 류의 책을 우리는 자기지식(Self Study)이라고 부른다. 바로  자신을 알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라는 말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이 말의 저자는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전 시대의 델포이 신전에 이 말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집트에 이미 같은 의미의 말이 존재했다고 하기도 한다. 아직 저작권 분쟁이 해결되지 않은 말이된다.

 

두개의 자아

그들의 말처럼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 늘 노력을 해보지만 실제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모양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뿐 아니라 일상에서의 자신을 포함한다. 물론 스위스 작가 앙리 프레드릭 아미엘의 말처럼 "자기라는 존재가 스스로 생각하는 그대로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에게 나자신은 간혹 낯설다.

 

왜그럴까? 티모시 윌슨에게 있어 나자신이 내게 낯선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 자신에게는 두개의 자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우리가 자각하고 있는 의식속의 나이며 또 하나는 무의식 또는 비의식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티모시 윌슨이 말하는 ‘자기 지식’의 대상은 ‘무의식’이 포함된다. 우리가 자각하고 있는 의식속의 나는 생각을 통해 알아지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과거 많은 심리학자들이 이미 이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해왔으며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로부터 시작했다고 할만하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생각에 있어 의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구하다. 티모시 윌슨에게는 빙산의 일각이 아니라 그 빙산 꼭대기에 살짝 쌓인 눈정도이다. 우리 생각의 99%가 무의식에 존재하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티모시 윌슨은 이 무의식을 적응무의식이라고 부른다. 적응무의식이 설정하는 무의식은 프로이트가 그린 무의식과는 성격이 다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불온하고 불쾌하고 원초적 충동과 같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다. 의식의 표면에 떠올라선 안 될 불편한 것들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묻혀 봉인된다.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것들이다. 그러나 윌슨이 말하는 무의식의 세계는 프로이트의 무의식보다 더 광범위하다.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의 경우와 같지만, 삶을 살아가는 데 유용하고도 필요한 것들을 포함한다. 비유로 말하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정신이라는 가족 중에서 떼를 쓰는 어린아이이며, 윌슨이 말하는 무의식은 그 어린아이를 잘 관리하도록 채용된 보모이다.

 

이 무의식이 자기계발이나 성공학의 저자들이 수없이 강조하는 잠재의식에 성장하는 곳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엄청난 힘, 신념만으로도 성공을 이룰수 있다는 신념론이 살아가는 장소다. 우린 그런 무의식의 세계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부정하지도 못했지만 증명된 사실도 없이 받아들여온 것도 사실이다.

 

무의식의 존재

티모시 윌슨의 [나는 내가 낯설다]가 가지는 설득의 힘은 이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내는 것이다. 무의식에 전등을 가져되거나 X-ray를 들이된다고 해서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티모시 윌슨은 이를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만약 우리에게 무의식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의자에서 일어나기 위한 단순한 행동을 위해서도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해야한다. 왼발로 딛고 일어서면서 엉덩이의 무게로 뒤로 자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게중심을 계산해야 하고 오른발의 적정한 위치를 생각해 내야 할지도 모른다.

 

흔하지는 않지만 그런 환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 필요한 많은 행동이나 판단을 우리는 무의식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컴퓨터 자판기에 글자가 어디있는지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더 많은 오류를 만들어 낸다. 연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무의식이 의식을 대신해 줌으로써 더 효율적이 된 셈이다.

 

아이들이 쉽게 모국어를 배우는 것을 암묵적 학습이라고 한다. 이 또한 무의식에 의해 학습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무의식의 역할

적응 무의식은 말하자면, 제트비행기의 자동항법장치와 유사하다. 조종사가 의식적으로 기계를 작동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항로를 찾아가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적응 무의식은 이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파악하고, 위험에 대해 경고음을 내고, 목표를 설정하고, 세련되고 효율적인 행동을 시작하게 하는 임무를 탁월하게 수행한다.” 고 티모시 윌슨을 적고 있다. 적응 무의식의 도움이 없다면 삶의 99%가 불편하거나 아예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적응 무의식은 프로이트의 말처럼 억압 때문에 의식 바깥으로 밀려난 것이 아니라, 효율성 때문에, 다시 말해 지각되지 않아야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무의식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기도 한다.

 

우리가 매초 오감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는 1,100만개 이 중 의식적으로 처리할수 있는 정보는 최대 40개란다. 나머지 1,0999,9960개의 정보는 무의식 중에 처리된다고 한다. 이 모든 정보를 우리의 의식이 처리한다면 정말 엄청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의식은 추론이나 판단, 분석등의 기능을 행하고 그의 수만배에 달하는 일상의 행동은 무의식이 처리하는 셈이다. 티모시 윌슨은 행정부처에 있어 대통령과 주요 각료를 의식 그리고 하위 공무원을 무의식에 비유한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세계가 그런 네트워크 구조로 이루어 진 것은 그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티모시 윌슨에 의하면 적응 무의식은 의식에 비해 신속하고 바꾸기가 어렵우며 부정적인 정보에 더 민감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따라서 편견과 같은 우리 무의식의 생각을 변화시키기가 어렵다. 적응 무의식은 익숙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습관성은 편견이라는 폐해를 낳는다.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남·녀에 대한 편견은 의식적으로는 스스로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무의식 속에서 계속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무의식이란 효율적이면서 부정적일 수도 있따. 문제는 이 무의식의 세계는 나의 의식의 파이프를 갖다 될 수 없는 곳이며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무의식을 이해할 수 있을까? 티모시 윌슨은 정확한 방법은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추론할 뿐이다. 그 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관찰한 결과를 가지고 나를 추론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다른 사람들에게 에 대해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또하나의 방법은 스스로 자기를 관찰해 보는 것이다. 무의식이 우리의 의식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살펴본다는 말이다. 티모시 윌슨은 “자신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관찰자가 됨으로써 우리는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결국 티모시 윌슨은 이 무의식을 관찰하고 조정하려 노력하는 것 보다 의식적인 노력으로 무의식을 바꿔나가는 방법이 더 나은 선택임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훌륭한 역할 모델을 설정하고 끊임없이 노력해 보는 것이다. 물론 그 모델이 본래의 나의 기질과 특성에 가까울수록 더 효율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티모시 윌슨은 “우리는 우리가 흉내를 내려고 노력하는 그 존재가 된다”라는 커트 보네거트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티모시 윌슨의 [나는 내가 낯설다]를 통해 우리의 생각속에 무의식이 존재하며 그로 인해 내가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어떻하라는 말인가?

 

저자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가장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자아가 하나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게다. 그것이 건강한 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 맨 처음 해야할 일이 될 것 같다. 화가난 나를 보고 변덕스러운 나를 보고 절망하고 후회하기 보다는 또 다른 나를 인정하고 그를 관리하도록 노력하는 일 말이다.

 

아침에 가족에게 쓸데 없이 화가 난다면, ‘또 그 녀석이 나타났구먼, 오늘은 이 녀석에게 지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 일이다.

 

또하나는 과거의 상처를 좀더 건설적으로 해석해 보는 일이다. 어차피 정확한 나를 우리가 기억하거나 이해할 수 없으니 말이다. 우리 모두는 한편이상의 소설이다. 걸어 다니는 자서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나의 이야기와 미래의 나에 대해 나름대로 추론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렇다고 엉뚱한 인물을 만들어 낼 수 는 없다. 자아의 이야기들은 한가지 의미에서 정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 사람의 비의식적인 목표와 감정, 기질들의 본성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 이야기와 그 사람의 적응무의식 사이에는 어느 정도 조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고차원적이고 정교한 사고의 상당 부분을 무의식에 넘길때 가장 효율적으로 작용한다면서 지나치게 의식적으로 자기 성찰을 하지말라는 티모시 윌슨의 조언을 기억해 두자

 

그리고 각 자가 되고자 하는 방향으로 행동을 먼저 변화시켜 무의식을 바꿔나가는 방법을 택해 보는 것이다. 사람이 한가지 행동을 실행에 옮기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에서 알고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있는 행동을 하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